궁극의 기술 NANO의 현재와 미래
'선구자' 에릭 드렉슬러 박사가 본 궁극의 기술 NANO의 현재와 미래
수십년내 나노(머리카락 1만분의 1 크기)기계가 조립하는 꿈의 공장 출현한다
제조공정 수억 배까지 정밀해져… '궁극의 제조기술'로 인류는 급진적 풍요 맛볼 것
"혁신(innovation)에 미국의 미래가 걸렸다."
지난 1월 국정연설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혁신'이란 말을 11번 꺼냈다. 1년 전 연설에서는 세 번 나왔던 단어다. 무엇이 1년 만에 대통령을 이렇게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금융위기 후 2년이 지났지만 경제는 회복이 더뎠고, 경기부양책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산업 전반을 혁신해 경제의 기초를 다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미국 정부가 첨단 기술 육성에 힘을 쏟는 것이 이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나노기술. 미 행정부가 6월 첨단제조업파트너십(AMP·미국제조업지원육성책)을 발표하면서 강조한 것도 나노기술의 발전이다. 이를 통해 '메이드인 USA'의 활력을 되찾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작년 16억달러, 올해는 18억달러의 예산을 나노기술 육성에 책정했다.
▲ 1992년 37세 때의 에릭 드렉슬러 박사. 그는 31세이었던 1986년‘창조의 엔진’이라는
책을 쓰면서 나노기술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렸다. / 코르비스
사람 머리카락 굵기 1만분의 1 크기. 사람 손톱이 1초 동안 자라는 길이. 이것이 나노의 세계다. 이런 극한의 단위에서 과연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 17일 미국 첨단산업의 집결지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56)는 이렇게 말했다.
"분자 단위에서 제품을 만드는 날이 수십 년 안에 온다. 기존보다 50배 강하면서도 가벼운 강철,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는 컴퓨터, 각설탕 한 개에 도서관 내 정보를 다 담을 수 있는 기술 모두 가능해진다. 나노기술은 결국 '궁극의 제조기술'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급진적 풍요를 맛보게 될 것이다."
드렉슬러는 나노기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나노 수준의 현상, 나노 수준의 장치가 왜 기술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한 책 '창조의 엔진'(1986)과 '나노시스템스'(1992)를 통해 나노기술이라는 용어를 전 세계에 정착시켰다. 특히 '창조의 엔진'은 13개국어로 번역돼 나노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움으로써 나노기술의 산업화와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학계엔 "너무 멀리 나갔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의 아이디어와 비전은 나노기술의 궁극적 이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앞다퉈 나노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은 '창조의 엔진' 출간 15년 후. 글로벌 기업들도 기술 경쟁에 시동을 걸었다. 나노기술은 반도체, 신약(新藥), 태양전지, 초경량·고강도의 스포츠용품, 은나노 세탁기·화장품 생산 등 산업 전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드렉슬러도 기업들을 대상으로 나노기술 관련 컨설팅을 하고 있다. 미국의 생활용품 업체 P&G 등이 나노기술을 제품개발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에게 묻고 있다.
성장 한계론 구원자 ‘나노’
원자 수준까지 물질 조절… 고장 없고 성능 뛰어난 물건 싼값에 생산할 날 열릴 것
나노물질 개발을 통한 제품 혁신은 계속된다
드렉슬러는 나노기술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 의학·바이오 분야에서 나노기술이 가져다줄 미래를 예견했다. 그는 세포에 담긴 모든 유전 정보를 가지고 세포단위로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세포수리공정'을 제시했다.
"우리 몸 자체가 분자로 만들어졌다, 병자·노인·부상자의 공통점이 뭘까? 원자의 패턴이 잘못 배열돼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포 안으로 들어가서 수정할 나노단위의 장비를 만들어 내야 한다."
드렉슬러의 세포수리공정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인류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 정보를 통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겠다는 목표다.
그는 1986년 펴낸 '창조의 엔진'에서 특정 바이러스만 선별적으로 파괴하는 물질도 제시했다. "이 물질은 우리 몸의 혈관을 따라 이동하다 침입자(바이러스)를 발견하면 박멸한다. 이 물질은 특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수명을 다해 다른 노폐물과 함께 몸 밖으로 나온다."
그의 예견은 암세포만 선별적으로 치료하는 방법들을 통해 지난 20년간 진전을 보였다. 제약업체들은 항암제를 감싸는 캡슐 역할을 하는 물질을 개발해 이를 암세포에 전달하는 '전달물질'을 개발하고 있다. 드렉슬러가 '나노기술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그렸던 큰 그림이 점차 기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의 엔진'에서 극미세 단위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나노장비의 출현을 예견했다. 이미 세계 기업들은 그의 비전 아래 나노 단위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3위인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 일본의 엘피다는 반도체 공정기술을 30~40나노미터급까지 줄여나갔다. 수치가 줄어들수록 같은 크기의 반도체 안에 보다 많은 용량의 정보가 저장된다. 이런 반도체를 장착하면 제품의 크기는 줄고 기능은 향상된다.
17일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드렉슬러는 "지난 20년간 기술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라면서 "이 속도라면 내가 '창조의 엔진'에서 제시했던 미래가 수십 년 안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창조의 엔진'을 저술, 나노기술을 세상에 알렸던 MIT 천재는 이제 반백의 중년이 돼 있었다. 그는 두번째 부인인 중국계 미국인 로사 왕(Wang)과 함께 '급진적 풍요'(내년 9월 출간)라는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신작에서 그는 '나노 수준의 생산공정'(어셈블러·assembler)의 출현으로 인류가 급진적인 물질적 풍요를 맞보게 될 것이라 썼다. 그에 따르면 원자를 조립해 다양한 물질을 생산하는 조립 공정이야말로 나노기술의 핵심이다. 머리카락 1만분의 1 크기에서 원자를 메뉴얼에 따라 이리저리 조립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얘기들은 소설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아직 구현되지 않았을 뿐. 500년 전 인공 새(비행기)를 고안했던(비록 당대에 나는 데 실패했지만) 다빈치를 생각해보라."
분자 수준에서 병 진단·치료
병든 세포 찾아내 치료하는 ‘세포수리기계’가 나온다면 인간은 건강하게 장수…
질병·노화 비밀 푸는 게 나노기술의 최고봉
“내 얘기들은 소설 아니다 500년전 비행기 고안했던 다빈치를 생각해봐라”
◆드렉슬러의 '꿈의 공장'
나노 수준의 생산공정은 무엇일까? 드렉슬러는 자동차를 만드는 광경을 예로 들었다. 공장 안에서 수조 개의 원자 덩어리(부품)가 매뉴얼에 따라 조립돼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나노 수준의 공정에서는 원자 하나하나를 원하는 위치에 장착해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게 된다. 제조공정이 지금보다 수억 배까지 정밀해질 수 있다는 소리다.
"물질이 원자 수준까지 조절되면 제품 고장은 거의 없다. 고장이란 수많은 원자가 제 위치에서 벗어날 때 생기니까. 생산비용이 저렴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기능을 지닌 제품이 쏟아질 것이다. 이것이 궁극의 제조기술이다."
드렉슬러의 예측은 학계에서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6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미국 라이스대 리처드 스몰리(Smalley·1943~2005) 교수는 2001년 미국의 월간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서 드렉슬러를 비판했다. "원자를 집어 원하는 위치에 넣으려면 손가락(조작 장치)이 달려 있어야할 텐데, 나노 수준에서 그런 정교한 손가락을 붙이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드렉슬러는 "나는 나노 수준의 조립공정에 손가락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조립공정은 자연에 존재하는 리보솜에서 착안한 것이다. 리보솜은 세포 안에서 유전 정보의 지시(매뉴얼)에 따라 고분자 유기화합물인 단백질을 생산한다. 리보솜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비행기가 그렇듯 기술의 많은 부분이 자연현상에 착안해 이뤄졌다. 스몰리와 본격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싶었지만 6년 전 세상을 떠났다. 막상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궁극의 기술은 한국 같은 곳에서 나올 것"
나노 수준의 제조공정에 대해 과학자들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재 기술 수준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드렉슬러의 꿈은 다른 차원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기존 제품에 첨가하면 제품의 성능을 탁월하게 향상시키는 나노 물질이 하나 둘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리처드 스몰리 등 세 명의 화학자들이 탄소 원자 60개가 자기조립돼 마치 공처럼 둥글고 안정된 구조를 형성한 탄소 분자(후에 '풀러렌'으로 명명)를 발견했다. 그 후 1991년 일본의 재료과학자인 이지마 스미오(1939~)가'탄소나노튜브'를 발견한다. 탄소 6개로 이뤄진 다수의 육각형이 서로 연결돼 원통형 구조를 이룬 물질이었다. 이 나노 물질들은 구리보다 전류를 잘 전도하고 다이아몬드보다 열을 잘 전달한다. 끊어지지 않고 잘 휘어지거나 비틀어진다. 이 때문에 탄소나노튜브는 반도체, 평판디스플레이, 배터리, 초강력섬유 등에 이용되고 있다.
열 개~수천 개의 원자로 구성된 나노입자 역시 다양한 제품에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은 나노 입자다. 항균성·살균성이 뛰어나 세탁기, 장난감, 속옷, 화장품 등에 사용된다. 일반인들에게 '나노기술'이 알려진 것은 이런 소비재를 통해서다. 드렉슬러는 나노 물질의 출현을 과도기라 여겼다.
"나노 물질이 첨가된 제품은 여전히 비싸다. 내가 나노 수준의 조립공정을 '궁극의 제조기술'이라고 한 것은 제품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제품을 싼값에 생산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나노물질을 응용한 제품도 생산비용이 내려가면 우리의 생활을 많이 바꿔놓을 것이다."
드렉슬러는 제조업 기반이 강한 한국과 같은 나라가 나노기술을 선도할 것이라고 했다. "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였다. 그런데 지금은 1등 기술국가가 됐다. 5년 전 한국의 포스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엔지니어의 근성을 봤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일단 만들어 보자, 현장에서 부딪혀 보자' 한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이미 죽어버린 엔지니어의 혼을 접하고 감동을 받았다."
◆나노기술이 노화·질병의 비밀을 푼다
나노기술이 혁명을 가져다줄 분야는 제조업뿐만이 아니다. 드렉슬러는 의학과 바이오산업의 발전에 주목했다. 그는 "사람 몸을 고치는 세포수리공정이 인류를 노화와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세포수리공정은 자동차 기술자가 차를 수리하는 과정에 비유된다. 자동차 기술자는 차 안에 장착된 수많은 부품 목록에 따라 고장 난 차를 수리한다. 나노기술 역시 건강한 조직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병든 세포를 치료한다." 드렉슬러는 "나노기술을 이용한 완벽한 세포수리공정이 100년 이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1986년 '창조의 엔진'에서 특정 바이러스만 골라 파괴하는 나노물질도 제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약물을 우리 몸 필요한 부위에 선별적으로 전달하는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의 제약업체 질리어드 사이언시스는 지름이 100나노미터가 되는 리포솜(방울 모양으로 속이 비어 있다)이라는 물질로 악성 종양을 치료한다. 리포솜이 항암제를 감싸는 캡슐이 돼 에이즈와 관련된 카포시 육종(악성 종양)을 선별적으로 공격한다. 리포솜에는 암세포와 잘 결합하는 분자들이 붙어 있어 리포솜 안의 약물이 암세포 안에 주입되는 것이다.
2000년대 MIT의 로버트 랭어(Langer) 교수는 특정 부위만 공격하는 약물 전달 방법을 제시했다. 폴리머(분자의 기본 단위가 반복돼 이뤄진 화합물)로 만든 얇은 판 안에는 나노 크기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안에 특정 약물을 넣는다. 환자가 폴리머를 삼키면 폴리머 구조가 열리면서 약물이 나오는데, 그 속도가 느려 조금씩 연속적으로 병든 부위에 가 닿는 식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사진을 찍기 위해 그와 함께 주변 서점을 들렀다. 그가 "과학·공학 코너에서 포즈를 취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한참을 둘러보다 서점 구석에서 책장 3개로 이뤄진 과학서적 코너를 겨우 찾았다. 가장 좋은 자리에는 금융·경영 코너가 차지하고 있었다. 책장만 9개였다.
"똑똑한 애들이 저런 책만 사니까…. 이게 미국의 현실이지. 요즘엔 나노기술에 대한 내 비전이 과연 수십년 안에 등장할 수 있을지 살짝 불안하기도 해."
▶나노(nano)
10억 분의 1을 뜻함. 고대 그리스에서 난쟁이를 뜻하는 나노스(nanos)에서 유래. 1나노미터(nm)=10억 분의 1미터=수소원자 10개를 늘어놓은 길이=박테리아 크기의 1000분의 1=머리카락의 1만 분의 1=사람 손톱이 1초 동안 자라는 길이
나노기술
1~100나노미터 길이 범위 내의 원자·분자 수준에서의 연구와 기술개발(미국국가나노기술개발전략·NII)
①나노 크기의 물질로 이뤄진 미세한 크기의 재료·기계를 만드는 기술
②나노 크기 영역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물리 현상을 응용해 기존 장비의 성능을 크게 향상시키려는 기술
③눈으로 볼 수 없는 미세한 영역의 자연현상을 측정·예측하는 기술(서울대 서갑양 교수 ‘나노기술의 이해’·서울대출판문화원)
[조선일보]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9/2011081901154.html